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문단 편집) ==== [[단원고등학교|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야기 ==== * 1. '''최덕하''' 학생 (향년 16세) [[파일:최덕하.jpg]] : 사망 당시 2학년 6반. 최초로 해경에 신고해서 170여 명의 시민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구명조끼도 못 입고 빠져나오지 못해 끝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구출해 달라며 눈물의 편지를 썼다.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던 세월호 참사이지만 이 학생이 그 기점이 되었다. * 2. '''정차웅''' 학생 (향년 16세) [[파일:정차웅.jpg]] : 사망 당시 2학년 4반. 해당 사고 전체 최초 피해자이다. 옆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면서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의식 불명이 되어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이때 정차웅 군의 부모님이 진도로 오고 있었다.] 골든타임을 놓쳐버려서 끝내 숨졌다. 그리고 정차웅 군을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애절한 [[https://n.news.naver.com/article/112/0002562941|짧은 편지]]를 남겼다. 늘 생전에 故 슬라바(세르코프 빌라체 슬라브) 군과 맨날 같이 어울려 붙어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 3. '''남윤철''' 교사 (향년 34세) [[파일:남윤철_선생님.jpg]] : 단원고등학교 교사.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하달한 후 학생들을 대피시키려고 끝까지 싸웠던 교사. 생전 2학년 6반 담임이였으며 6반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지말라는 지시를 내린덕분에 6반에 많은 생명을 지킬수있었다. 수습도중 6반에 학생이였던 고 이다운군이 남윤철 선생님 옆에 기대서 사망했다는루머가 있었으나 사실인지는 불명이다. 사건 이후 하루만에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1년 뒤, 그의 모교인 [[국민대학교]]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남윤철 교사가 재학 중 마지막으로 전공 강의를 수강했던 북악관 708호실을 '''남윤철 강의실'''로 명명했다. * 4. '''[[최혜정(1990)|최혜정]]''' 교사 (향년 23세) [[파일:최혜정 선생님 졸업사진.jpg]] * [[https://historyedu.dongguk.edu/bbs/board.php?bo_table=history6_1&wr_id=110|『연꽃으로 피어난 참스승, 최혜정』(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역사편찬원, 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 2022)]][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최혜정(1990))] * 5. '''전수영''' 교사 (향년 24세) [[파일:전수영_선생님.jpg]] : 단원고등학교 교사로, 학교에 약 1년 근무 중이었던 선생님이었다. 사건 당시엔 2학년 2반 담임. 사건 발발 후 자신의 부모에게 마지막 문자와 전화를 하고 학생들을 지키려다 사망했다. 그리고 60일 뒤 사랑하는 제자들 옆에 묻혔다. 생존자 말로는 그가 마지막으로 전 교사를 보았을 때는 전수영 교사는 학생들을 구하느라 너무 많이 지쳐 보였다고 한다. 참고로 故 전수영 선생님 한테는 남자친구도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세월호 침몰 사고로 여자친구를 잃었다. 그녀의 모교인 고려대학교는 그녀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건물인 운초우선교육관 내 4층에 위치한 라운지를 "전수영 라운지"라 명명하였다. * 6. '''양온유''' 학생 (향년 17세) [[파일:1458956683SpgYNBBgqRfhxY9P9es17.jpg]] : 2학년 2반 반장이었다. 침몰 사건 당시 빠져나올 수 있던 4층에 있었으나, 아래에 있는 선실로 가서 친구들을 구하려다 끝내 숨졌다. * 7. '''생존자 조대섭''' 학생 [[파일:htm_201404171275730103011.jpg]] : 75명의 생존자 중 1명. 74번째 탈출자이다. 침몰이 일어나고 난 후 친구들인 여학생 20명을 구조하고 자신도 겨우겨우 구조되었다. * 8. '''생존자 박호진''' 학생 [[파일:external/f6bc5402868d951b64e14629a6bd51cd3c244d91a639dfe469913e177ea8e599.jpg]] : 단원고 생존자 75명 중 한 명이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권지연 어린이(당시 5세)를 가장 먼저 구조했다. 그러나 권지연 어린이의 6살 오빠, 엄마[* 권지연 어린이의 엄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중 유일하게 수습자이자 사망자로 이름은 현윤지다. 남편인 권재근 씨와 아들인 권혁규 군이랑 같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자들 중 현윤지 씨만 유일하게 차가운 세월호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빠는 끝내 숨졌다. 오빠인 권혁규 군과 아버지는 아직도 차가운 세월호 안에 있다. * 9. '''생존자 박준혁''' 학생 [[파일:external/www.mediaus.co.kr/52766_127660_116.jpg]] :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5반. 공식적으로 확인된 세월호의 '''마지막''' 구조자이자 75번째 탈출자, 그리고 단원고 생존자 75명 중 한 명. 그에게는 단짝친구인 세월호 희생자 故 임경빈 군(향년 16세)이 있는데 세월호 침몰 사고로 단짝친구를 잃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10시 21분 경, 그는 복도에서 그의 담임 교사, 100여 명의 친구들하고 일반인 승객들하고 필사의 탈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친 물살이 그들을 덮쳤고, 박 군만이 겨우 줄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 김수정 양(향년 16세)과 같이 나오려고 했으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김 양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10시 24분, 박 군만이 겨우 세월호 안에서 탈출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졸업식에 2명의 여학생과 2년 전 못 갔던 수학여행을 갔다. 그리고 지금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세월호를 알리고 있다. [[사학과]]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며, [[단원고 특별전형]]으로 2016년 3월에 경기도 모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EBS 다큐 '감정시대'에 따르면 박 군은 선배들이나 또래 여자 아이들과는 왕성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데 반해 또래 남자 아이들과는 새로운 친구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고 한다. 어머니와 인터뷰한 결과 고락을 함께 했던 같은 학교 친구들을 대부분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같다. > "[[보도연맹 학살사건|국민보도연맹 사건]]에도 역사에는 단순히 20만 명이 죽었다고만 쓰여 있는데, 그 20만 명의 사람들의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요. 20만 명의 사람에게는 20만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기억은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 '''[[https://books.google.co.kr/books?id=owhGDAAAQBAJ&printsec=frontcover&hl=ko|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창비, 2016]]''' > '''[[https://www.youtube.com/watch?v=z5oVewnyiME|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5부 - 스무 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1)]]''' * 10. '''김동혁''' 학생 (향년 16세) [[파일:단원고 김동혁.jpg]] : 사망 당시 단원고 2학년 4반. 문자 메시지로 자기의 여동생에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고 오빠로서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래서 김예원(여동생)은 '약속을 꼭 지키고 살겠다.' 라는 응답을 했다. 참고로 고인의 여동생도 [[단원고]] 학생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s9o-uadI|#]] * 11. '''박수현''' 학생 (향년 16세) [[파일:단원고박수현.jpg]] : 사망 당시 단원고 2학년 4반. 10시 11분에 세월호의 마지막 사진 8장을 보내고 숨졌다. 10시 18분, 박준혁 군이 빠져나오기 2분 전, 해경이 44명의 승객들을 구출할 때 창문을 의자로 추정되는 물체로 깨려고 시도했으나 깨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밖에 있던 해경들이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30초에서 1분 후 그가 있었던 방에 물이 들어왔다.10시 18~19분에 숨진것으로 확인된다. 이 학생이 보낸 마지막 사진들은 이후 [[이준석(선장)|이준석]]이 재판 받을 때 결정적 증거 중 하나가 되었다. * 12. '''안중근''' 학생 (향년 16세) [[파일:안중근 단원고.jpg]] : 사망 당시 단원고 2학년 7반. 장래희망이 [[야구]] 선수였으며, [[두산 베어스]]의 팬이었다. 더불어 그의 유니폼 마킹은 '21, 안중근'이었는데, 백넘버 21번은 두산 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박철순]]의 백넘버이자 안중근 군의 출석번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유니폼은 두산 베어스가 선수들이 사인한 야구공과 함께 기증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 가보면 실제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이 있었는데, 그의 영정사진 밑에 있다. 그 유니폼을 보자 깊은 울음을 터트렸던 빈소객이 있었다고... 2018년 4월 16일 후로 분향소가 철거되어서 볼 수 없다.] 그의 사연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8&aid=0002257010|이 기사]]에서 더 볼 수 있다. * 13. '''A''' 학생 (향년 17세) : 자기 형에게 9시 25분쯤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형이 문자를 다시 보냈는데 확인을 못 했다고 한다. * 14. '''생존자 B''' 학생 : 이준석 선장 등에게서 재판이 열렸을 때 "배 안에서 선원들은 아무것도 안 했고, 가만히 있으면 산다고 했는데 가만히 있다가 저까지 죽을 뻔했어요.''라고 말했다. * 15. '''고창석''' 교사 (향년 39세) [[파일:고창석 교사.jpg]] : 세월호 미수습자 9명 중 최초로 유골이 발견되어 수습됐다. 생전에는 단원고 2학년 체육 과목 교사였으며, 또치 머리를 가졌다고 하여서 학생들로부터 '또치 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수영에 능하였던 편으로 알려졌던 편이었다. 세월호 사고 때는 인솔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던 중 세월호가 침몰하게 되자 자신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제자들에게 입히면서 사고 와중에도 제자들을 유도하여 피신시키다가 본인은 끝내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3년 동안 세월호와 함께 해저에서 미수습 상태로 수장되었다. 2017년 5월 5일 미수습자 9명 중 최초로 유골이 사고 해역에서 발견되어 미수습자 중 첫 수습자 및 296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고창석 교사는 생전에 자신의 아내와 결혼해서 아들들을 2명이나 둔 유부남이었다.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아내와 사고 당시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었는데 현재는 고등학생이랑 중학생이 돼버린 아들들을 가족으로 두고 있었다.[* 故 고창석 교사의 유해가 발견될 당시 고창석 교사의 아들들은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고창석 교사의 아내는 세월호 침몰 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고창석 교사의 아들 2명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 16. '''허다윤''' 학생 (향년 16세) [[파일:허다윤.jpg]] : 사고 당시 2학년 2반. 세월호 미수습자 9명 중 고창석 교사에 이어서 2번째이자 미수습자 학생 중에서는 최초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어린 시절에 치아 수술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 유골의 치아 상태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었다. 세월호 승선 당시 우현 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3년만에 세월호가 인양되어서 수색을 하게 되었을 때 세월호 우현 부분에서 유골이 발견되면서 정밀 유골 치아 검식 과정을 거친 결과 10대 여학생의 치아였음이 확인되어서 29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수학여행 당시 아버지의 검정색 모자를 쓰고 마지막 출항을 하였던 사연이 있었고, 세월호 침몰 때 친구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은 배에 나오지 못한 채 3년 동안 해저에 수장되어 유골로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어머니는 사고 발생 전부터 [[신경섬유종증|신경섬유종]]을 앓아 청력 손실이 진행 중이었으며, 이 참사의 충격으로 청력 손실이 가속화되어 결국 남아있던 청력을 모두 잃게 되었다. * 17. '''최성호''' 학생(닉네임: 레네미아(어르미)) (향년 16세) [[파일:단원고 최성호.jpg]] : 단원고 2학년 4반, 생전 [[트위터]]를 했던 트위터리안이다. 주로 [[마비노기]]를 즐겨 했으며, 마지막으로 트위터에 "지금 타고 있다고요. 침몰하는 거에... 살려달라고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작성 기록은 2014년 4월 16일에 끝나 있다. [[https://twitter.com/starcyker28|트위터 링크]].[* 현재 최성호 학생의 트위터에 올라온 마지막글에는 최성호 학생을 추모하는 댓글이 매년 올라오고 있다.] 트윗들을 보면 미래에 관련된 이야기, 혹은 희생자가 된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도 보이는데 상당히 가슴 아프다. 참사가 일어나기 몇 시간 전에 레크레이션과 불꽃 놀이를 하는 사진들을 올렸다. 트위터에 나온 생전 같은반이였던 故 김호연군의 이름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김호연군도 목숨을 잃었다. * 18. '''양승진''' 교사(사망 당시 57세) [[파일:201704161078040787_12.jpg]] : 불명확한 여러 이슈가 제기된 실종자 교사. 배가 기울 때 충격 발생 시 열린 문으로 심하게 튕겨져 나가 바다에 빠졌다는 다수 학생의 목격담도 있지만, 더 많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 착용 등 주의사항을 알리려고 뛰어다니며 다른 층으로 이동한 후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증언이 일치되지 않는다. 양쪽 의견 모두 사실일 가능성[* 최종 좌초 충격 10여 분 이전에 최초 충격이 있어서 위험을 인지하고 담임으로서 학생들을 챙긴 후 뛰어나가 다른 학생들도 챙기던 와중에 좌초 충격으로 바다에 튕겨져 나갔다는 추측 등.]도 있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실종 상태가 되었다. 역시 양승진 교사는 고창석 교사 처럼 생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내가 있다. 이로 인해 양승진 선생님의 아내는 세월호 참사로 남편을 잃었다. * 19. '''생존자 [[장애진]]''' 학생 [[파일:89615419.3.jpg]] : 75명의 생존자 중 1명. 원래는 유치원 교사를 꿈꿨으나 유아교육과를 가려고 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응급구조사를 꿈꿔서 응급구조학과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희생 학생 김민지, 김민정 학생과 친했다고 한다. 119 구급대원이 목표라고 한다. 23년 기준으로 응급구조사의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https://m.youtube.com/watch?v=8F1llyKQZfY&pp=ygUT7IS47JuU7Zi4IOyepeyYiOynhA%3D%3D|#MBC뉴스영상]] * 20. '''김동협''' 학생 (향년 16세) [[파일:세월호 김동협.jpg]] : 1998년 1월 출생.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6반 6번. [[https://youtu.be/TmVA-3legTo?si=XQM2ExIyT49r9GPV|뉴스를 통해서 김동협 학생의 생존 당시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을 보면 김동협 군이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난 꿈이 있는데! 나 살고 싶어요 무서워요.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 니들때문에 나는 죽어!''' 라고 울먹이며 절규하는 장면이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 21. '''슬라바[* 러시아식 본명은 '''뱌체슬라프 니콜라예비치 세르코프(Вячеслав Николаевич Серков)''']''' 학생 (향년 16세) [[파일:세월호 슬라바.png]] : 1997년 7월 출생.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4반 19번. 슬라바는 원래 러시아 사람이고 러시아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이혼 후 한국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와서 살게 되었다.[* 슬라바의 친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한국 국적이 없다는 점, 한국 이름이 아니라는 점, 만약 친아버지가 한국인이라면 슬라바의 외모가 이상할 정도로 아버지와 안 닮았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은 맞다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부모님의 이혼 후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왔다.' 이렇게 소개한다.] 비록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운동신경이 좋고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항상 인기가 많았다고... 슬라바의 꿈은 수영선수로 수영선수가 되려면 한국 국적이 필요하기에 슬라바는 한국 국적을 신청해놓은 상태였고 세월호 사고 얼마 후 한국 국적이 나올 예정이었다. 슬라바는 정차웅 군과 가장 친하게 지냈으며 12살 어린 남동생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형이었다고 한다.[* 남동생은 한국-러시아 혼혈이며 가장 먼저 배운 한국어가 '''슬라바'''였다고 한다.] 그는 안타깝게도 세월호 사고로 사망했으며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다. 묘소에 가면 슬라바군의 (양)아버지가 적은 편지[* '''사랑하는 우리 아들 슬라바. 꿈속에서라도 한번만 안아보고 싶구나. 사랑한다.''']가 있다. * 22. '''문지성''' 학생 (향년 16세) [[파일:세월호 문지성.jpg]] : 1998년 2월 6일 출생.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1반 17번. 문지성은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예쁜 외모로 연예계 회사에서도 여러번 스카웃 될 정도였지만 본인은 [[스튜어디스]]가 꿈이라고 매번 거절했다고 한다. 문지성은 항상 가족들에게 '''내가 [[경기도]] 4대 미녀야'''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스튜어디스가 되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생각해서 영어공부에 열심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세월호 사고 3일 후 선박의 닻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효원추모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다. * 23. '''이보미''' 학생 (향년 16세) [[파일:단원고 2학년 9반_이보미.jpg]] : 1997년 11월 29일 출생이며,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 9반 13번.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 실제 가창력이 상당해서 중학교 때부터 [[YMCA]] 음악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안산 일대에서 자주 공연을 가졌다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수의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으며 새벽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생전 보미는 자기 관리에 무척이나 엄격한 아이였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할 때는 방울토마토 하나까지도 칼로리를 체크할 정도로 빡세게 했다고.] 여전히 노래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어 2013년 12월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식 때 [[거위의 꿈]]을 불렀다. 사망 이후 [[김장훈]]이 이보미 양과 듀엣으로 거위의 꿈을 발매했는데, 유가족들이 세월호 추모 무대에서 김장훈을 만났을 때 보미의 마지막 꿈을 이뤄줄 것을 부탁했고 김장훈은 노래 부른 아무 음원이나 달라고 한 뒤 곧바로 믹싱 작업을 했다고 한다.[* 노래 믹싱은 [[신해철]]이 맡았다.] * 24. '''이경주''' 학생 (향년 16세) : 1997년 9월 29일 출생이며, 사고 당시 2학년 10반 13번. 단원고등학교의 댄스 동아리 TREN.D의 멤버였으며, 댄스 실력이 월등해서 팀에서 에이스 멤버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초부터는 기획사 연습생이 되기 위해 오디션 준비중이었다고... 만약 참사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걸그룹 멤버로 데뷔해 활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TREN.D는 이 사고로 멤버 4명이 모두 사망하면서 해체 위기였지만, 유일하게 생존한 1명이 후배들을 모으고 이듬 해인 2015년부터 활동을 재개해 현재도 유지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